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무화과 숲 중, 황인찬
앉으나 서나 누워서도 한 칸 한 칸 어디로든 전진하는 세계
전재산을 모두 잃고도
다음 칸에서는 끈적한 여름 바닷가에 드러누워 칵테일을 마시는 세계
게임판 위에서 우리 중 아무도 죽음을 원치 않았지
전망들 중, 김리윤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환한 봄날, 공원 벤치에 겹겹이 쌓인 신문지 아래 발견된 노숙자의 시체 속에. 늦은 밤의 지하철, 끈끈한 땀에 젖은 어깨들을 겹치고 각기 다른 곳을 보는 사람들의 흐릿한 눈속에. 폭우가 퍼붓는 간선도로, 끝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의 행렬 속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로 할퀴어진 하루하루 속에. 그토록 쉽게 부스러지는 육체들 속에. 그 모든 걸 잊기 위해 주고받는, 뚝뚝 끊어지는 어리석은 농담들 속에.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적는 말들, 그 속에서 어느새 부풀어 오른 거품들의 악취 속에.
어느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밤, 혼자 오래 있거나 몸이 아픈 뒤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고요한 말이 문득 방언처럼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화해의 증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희랍어시간 중, 한강
아무리 손 흔들어도 이별할 수 없어
천 년이 지나면 끝날 것 같지?
아무래도 우리의 황금빛 허물은 은행나무에 업혀
천년을 더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고
속이 텅 빈 은행나무 안에서 백 년,
그리고 바깥을 떠돌며 또 천 년을 살아
형체도 맛도 소리도 없는 당신을 찾아 헤맨다
황금빛 울음 중, 박서영
나는 기억을 수집하는 척후병처럼 생각에 잠겨 있어
못에 걸린 방은 가끔 자지러지게 울고
검은 타액으로 자신의 몸을 닦아내고 있어
달은 희미한 저녁을 떨어트리고
태양은 재의 흔적을 어딘가에 숨긴 채 피어나고 있어
버렸다가 되찾아오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
한번 가진 적 있는 방을 잊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내 산책의 시간은 발등을 스르륵 빠져나간 외로움으로부터
달릴 수 있는 다리와
날아갈 수 있는 숨겨진 날개로부터
어디든 살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숨겨진 방 중, 박서영
너무 빨리 녹거나 돌아서는 세계를 용서할 수 없다
섬은 천천히 녹는 것이다
천천히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돌아섰는지 궁금해
혼이 나가버린 계절에 도착한 대답을 읽으며
나는 물에 젖은 답장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잠시 사랑하고 잠시 기다리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지켜봤다
섬 중, 박서영
수많은 고통을 탐사한 결과
뒤통수나 뒷면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어
그 구멍을 완전히 통과해야만 인간의 몸은 잿더미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문을 닦는 사람은 잿더미를 닦는 사람이 되고
나는 유리창에 부딪혀 본 적 있는 작은 새처럼
영혼에게 흰색 옷을 입혔다가
검은색 옷을 갈아입히기도 하는 것이니
유리창을 닦다보면 금 간 부분이 내 손바닥에도 전해져
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심장에 금이 쩍 가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 한 번 믿어보시라지
밤의 은하수와 하얀 쪽배와 나무 한 그루와 토끼 한 마리를
창문 닦는 사람 중, 박서영
자신에 대한 연민 없이, 마치 다른 사람의 삶에 호기심을 갖듯 그녀는 이따금 궁금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먹어 온 알약을 모두 합하면 몇 개일까? 앓으면서 보낸 시간을 모두 합하면 몇이나 될까? 마치 인생 자체가 그져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힘 자체가 자신에게 가로막힌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흰 중, 한강
사랑이라는 착란, 모든 것을 불사르게 하는 광채. 그것이 이 불완전한 세상을 창조한 천부적인 힘이라고 믿은 적이 있었다. 사랑의 치열한 맹목이 이 세상을 탄생시켰다고.
그러나 고독 속에서만 팔 벌려 맞이할 수 있는 진정한 소멸이 있다. 태초의 등대에서 우주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마주하면, 나는 수천 계단 끝의 머나먼 응시처럼 진실한 눈을 갖게 된다. 온기 없는 진실한 눈, 내가 감히 사랑보다 바라왔던, 진실한 눈을.
무풍지대 중, 윤희준
너는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를 타곤 했지만, 올라갈 땐 타지 않았다.
너는 나이가 들수록 덜 불행해지리라 믿었는데, 그때가 되면 슬퍼도 되는 이유가 있게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아직 젊었던 너에게 네 고통은 위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는데, 네가 보기에는 이 고통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네 자살은 터무니없이 아름다웠다.
한겨울에 너는 혼자 말을 타고 시골을 가로질러 떠났다. 네 시였다. 네가 종마 사육장에서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을 때 해가 지고 말았다. 천둥이 몰려오고 있었다. 말이 황량한 들판을 질주하고 있을 때 천둥이 쳤다. 마을의 윤곽이 멀리서 검푸른 색으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번개와 뇌명은 이 짐승을 겁먹게 하지 않았다. 얼마 동안 이어진 악천후는 이 짐승을 흥분시켰다. 너는 비 때문에 한층 냄새가 강해진 이 짐승의 목에 몸을 바짝 붙였다. 너는 물에 잠긴 어둠 속에서 말발굽으로 비옥하고 축축한 땅을 한 발씩 내디디며 여정을 마쳤다.
자살 중, 에두아르 르베
'당신'은 항상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 '당신'이 떠남은 '나'의 사랑이 좌절하고 '나'는 버려진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사랑에 빠진 '나'는 항시 불안하다. 그 불안은 유기(遺棄)의 공포가 자아내는 불안이다.
사랑은 서로에게 망명하는 일 중, 장석주
필요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내게는 오래되고 낡은 부채감이 있다. 수치심에 가깝다. 그것은 자주 나를 찾아온다.
내가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나 혼자 말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나 홀로 어떤 대열의 맨 뒤로 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중략)
공존의 비참함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나는 겨우겨우 이런 것을 하려고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걱정을 사며 매일매일 숨어 지내는데 겨우 나는 겨우 내가 겨우 이런 짓을 하려고 겨우 어째서 겨우겨우 잘하지도 못하면서
탁월하게 서글픈 자의식, 서글픈 자의식 중, 박참새
방향을 잃으면 시간이 걸린다. 사람을 잃으면 마음이 걸린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을 잃으면 나는 무엇을 걸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아주 오래 슬프게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쓰면서 내내 한 생각이다.
짜증이 날 정도로 모르겠다.
탁월하게 서글픈 자의식, 서글픈 자의식 중, 박참새
슬픔은 떨며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애지중지하는 것.
그리하여 나의 애도는 언제고 이미 시작된 상태. 시작되고 시작 중인 것. 시작할 수 없는 것.
언제나 애도였던 장소
이미 애도였던
이것은 우리 안에 있다. 언제고 있었다
탁월하게 서글픈 자의식, 서글픈 자의식 중, 박참새
당신이 사라져버린 이후 나는 전율하는 모든 순간들에게
묵념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타인의 일기 중, 박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