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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5
    소설
    2025-06-09

    긴 고통과 찬란한 평화를 꿈꾼다

    싯다르타
    4.5
    관람일 2025-06-09
    국가 독일계 스위스
    장르 소설
    감독 헤르만 헤세

    리뷰

    사실 싯다르타를 읽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기억도 안 날 만큼 사소하다. 읽은 것도 제법 오래 전이라… 기억을 더듬어야만 한다. 일단 대충 생각나는 건 대체로 두 가지. 첫째, 기대했던 젊은 작가 책이 너무 실망스러웠다(이거는… 길게 한탄한 글이 있어서. 그런데 요즘은 또 생각이 좀 다르기는 해.). 그리고 둘째, 세문전을 언제 한번 읽어야 한다고 다짐하던 와중에 교보문고에서 싯다르타를 맞닥뜨렸다.


    사실 그때 당시 나는 "언제 한번 세문전도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 정확히 무엇을 읽겠다는 명확한 목표는 없었다. 교보문고에서 세문전을 주르륵 마주쳤을 때만 하더라도 뭘 사야 할지 고민했다. 후보군은 많았다. 유명한 1984, 유튜버가 추천해서 관심을 가졌던 헌등사, 기타 등등… 사실 원래는 헌등사를 사려고 했는데 품절이었다. 그럼 진짜 뭐 사지? 고민하던 때 마주한 게 싯다르타였다.


    싯다르타. 일단 제목을 들어만 봤다. 불교에는 조예가 깊지 않은 터라 설명이 영 애매하기는 하지만… 부처 중 하나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싯다르타를 구매하도록 이끈 건 뒷표지에 적힌 설명 문구 중 일부였다. "『싯다르타』는 헤세가 거의 일 년 반 동안 창작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정신 치료를 받은 후 발표한 작품이다.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시적으로 승화한 일종의 종교적 성장소설로 볼 수 있는데 영원을 향한 갈망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초월에 대한 의지를 단순하고도 서정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이 내용을 보고서 정신 차려보니 결제한 뒤였다(…).


    앞선 글들에서도 종종 언급했지만, 나는 우울증을 오랜 시간 앓아왔다. 기억하는 대부분의 순간에서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긴 시간 동안 앓느라 기억력도 많이 저하됐다). 자해나 자살 사고는 심심하면 불쑥 올라오는… 결도 안 맞고 성격도 우악스러운데 영 떨칠 수가 없는 친구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고난과 시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성장 소설들을 좋아한다. 그래서였다. 조금 천박한 어투로 표현하자면, "헤르만 헤세가 말아주는 성장 소설을 어떻게 참는데?"


    감상을 가감없이 이야기하자면, 우선 초반부는 지루했다. 초중반까지는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하는 생각에 눈 뻑뻑 문질러가며 읽었다. 그런데 이해는 한다. 글이라는 게 원래 도파민 터지는 구간은 후반부에 몰아 있는 게 상당히 정석적인 구성이니까(애초에 기승전결 맞춰 쓰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고전 특유의… 여성관 같은 게 심심찮게 나오는데, 고전치고는 그래도 여성 캐릭터 사용이 굉장히 세련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살을 좀 찌푸릴 수는 있어도 이것 때문에 이 책 못 읽겠어요,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나를 완전히 매혹한 건 중후반부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가에서> 챕터 초중반 즈음. 너무… 너무 좋은 문장을 마주쳤다.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어쩌면 그 길은 꼬불꼬불한 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길은 원형의 순환 도로일지도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싯다르타, 140p.g 중)

    이 문장이 정말 심금을 울렸다. 그게 정확히 맞는 표현이다. 심금을 울렸다. 미래에 관한 고민을 항상 지니고 있었는데, 이 문장이 내 불안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려 주었다.


    두 번째로 좋았던 건 카말라의 죽음 파트였다. 이 부분은 지금도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다. 한참… 정말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문장이다.

    "당신은 그것을 얻으셨나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평화를 얻으셨어요?"

    그러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보여요." 그녀가 말하였다. "그것이 보인단 말이에요. 나도 평화를 얻을 거예요."

    "당신은 평화를 얻었소." 싯다르타가 속삭이는 소리로 말하였다. (싯다르타, 164p.g 중)

    그냥… 마냥 존경스럽다.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냔 말이야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잔잔하고 평온하지만 심장에 퍼지는 울림에 몸 전체가 떨리는 기분이다. 이 부분에서 정말 한참을…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책장을 넘기기는커녕 다음 문장으로도 차마 넘어가지 못하고서.


    평화를 얻고 싶었다. 오랫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지난했다. 너무 쉽게 지쳤고 그런 내게 단념은 지나치게 간편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막상 전부 포기하고 나니 내게 남은 게 없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평화를 원했다. 더는 힘들고 싶지 않았다. 아주 야트막하게 알 뿐이지만, 불교 사상에서는 삶이 고통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라고 들었다. 이게 정말이라면 나는 불교와 그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일 성싶었다. 그만큼 내게 삶은 고통스러웠다.


    어렸을 적 꿈은 해파리, 고래, 새. 아무튼 간에 이 인간 사회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그런 마음이 아예 없다고는 못한다. 50억 부자가 될래, 해파리가 될래, 하면 고민할 정도로. 사회 부적응자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사회는 불평등하며 내가 그 불평등의 수혜자라는 사실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많은 순간 자본의 착취에 가담하고 간접적으로나마 누군가를 죽이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사회의 모든 것에 넌더리가 나는데 공황과 불안이 심해 광장에 나가지도 못한다. 할 수 있는 건 나 대신 투쟁하는 이들에게 소액이나마 돈을 보내면서 스스로 자위하는 일뿐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데에 염증이 났다. (이렇게 쭉 적고 보니 진짜 사회 부적응자 같다… 맞긴 해.)


    이것도 저것도 고통인 내가 진정 바라왔던 것이 평화라는 사실을, 이 대목을 읽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동시에 위로도 받은 것 같다. 삶이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평화는 언젠가 오고야 만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는 형태를 입고 있더라도. 그리고 이 깨달음은 얼마 지나지 않은 <옴> 챕터의 두 번째 문단에서 해답을 제시하듯 길을 내보였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으며, 그는 그들의 모든 욕정들과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바로 생명, 그 생동하는 것, 그 불멸의 것, 범을 보았다. 그런 인간들은 바로 그들의 맹목적인 성실성, 맹목적인 강력함과 끈질김으로 인하여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싯다르타, 187p.g ~ 188p.g)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이유,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바로 생명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니까, 살아 있기에 고통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생동하게 한다는 것.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이야기다. 나는 살아 있기에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아 있으며 고통이 나를 살게 한다. 고통스럽게 살아내는 우리는 그 자체로 사랑할 가치가 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저 대목은 문단이 상당히 두꺼운데, 그 문단을 통째로 밑줄 치고 싶었다. 되짚는 지금도 코가 찡해질 만큼 내게는 크게 와닿았다. 좋았다… 좋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가장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싯다르타라고 자신 있게 답하게 되었을 정도로 좋았다. 고전에는 낭만과 감동과 교훈이 있다… 얘들아 그러니까 우리 같이 고전 읽자.


    싯다르타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세문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둔 건 많은데 완독한 건 별로 없다. 열심히 읽어야지. 나는 젊은 작가보다는 고전이 조금 더 취향인 것 같다. 고전이 고전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 싯다르타는 그 "이유"를 내게 몹시 명확히, 아주 명징하게 알려주었다.


    뇌를 지지고 싶어서 무턱대고 후기 쓸 책 없나 찾다가 시작한 글이었는데, 덕분에 마음이 조금 더 풍족해진 기분이다. 싯다르타를 고르길 잘했어. 마음이 자꾸만 갈라지고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 2
    소설
    2025-11-10

    조형된 불행과 와닿는 위로

    과잉 무지개
    2
    관람일 2025-11-10
    국가 한국
    장르 소설
    감독 김용재

    리뷰

    과잉 무지개. 사실 큰 관심은 없었다. 트위터에서 바이럴 타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했던가?) 나는 사실 트위터에서 바이럴되는 소설들, 특히 젊은 작가 소설들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다. 조각난 문장으로 알티를 태우고 이 문장이 너무 좋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무슨 내용이길래?하고 샀더니… (이하 생략). 아무튼, 과잉 무지개의 첫 인상도 그랬다. 아, 이거. 트위터에서 알티 탔던 그거. 그런데 왜 샀냐? 이야기가 길다. 간단하게 축약하자면 울분이 차올라서 책을 무한 매입하던 와중에 눈이 마주쳤다(…).


    총평부터 내리자면, 일단 읽기 쉽다. 킬링 타임용으로 괜찮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용이 아주 납작하거나 지나치게 가볍지도 않다. 전하려는 메시지가 확고했고, 그 명확한 주제 의식이 내게는 위로가 되어서 눈물이 좀 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한텐 거기까지였다. 주제 의식에 크게 공감한 건 내 현재 상태나 내가 겪어온 과거가 있기에 일종의 트리거로 작용했기 때문이지, 절로 눈물이 날 만큼 절절한 글이라서는 아니라는 게 내 평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자살하려던 주인공이 모종의 사건을 겪고 하나의 제안을 받는다. 백 일 후 고통 없이, 그리고 자신을 사회에 환원(장기 이식 등의 방식으로)하는 대신, 백 일 간 주인공에겐 매달 일정한 금액이 지급된다. 그뿐이 아니다. 무려 수천에 달하는 빚도 갚아준다! 이러한 제안에 주인공이 응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여기까지 보면 대강 견적이 나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도 대충 그랬다. 이런 글에서 주인공은 마지막에 가서 죽지 않는다. 죽으면 안 되는 것에 가깝다. 당연하다. "살다 보면 괜찮아진다", "삶에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몇 만자를 썼는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는 것은 자신이 힘겹게 쌓아 올린 서사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일이다. 과잉 무지개도 마찬가지였다.


    백 일 동안 여러 사건을 겪으며 주인공은 성장한다. 간절히 바라던 죽음을 부정한다. 살고 싶어진다. 살 힘을 얻고, 희망을 얻는다. 그리고 결말부에 다다라서 자신이 쟁취한 결실, 살고자 하는 마음을 입 밖으로 냄으로써 그것을 취한다. 전형적인 성장 서사다. 우울증을 깊이 앓았고, 현재도 그 영향을 끊임없이 받는 사람으로서, 주기적으로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대상자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위로…도 조금쯤 얻은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눈물도 고였으니까.


    하지만 눈물이 고인 것치고 내가 이 소설을 냉정하게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문장력. 둘째, 인위적인 사건. 셋째, 아쉬운 결말. 차례차례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로, 문장력. 서술문에서는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힘을 주고 빼는 강약 조절도 괜찮았다고 본다. 하지만 대사. 대사가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이게 문체라고 해야 할지… 서술을 잘 읽다가 대화에 진입하는 순간 약간 몰입도가 깨진다. 이것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이 사람들이 어디까지나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은 대화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대화는 소설에 몰입도를 부여하는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데, 과잉 무지개는 그런 면에서 볼 때 다소 아쉬웠다.


    구성 자체는 빈틈없이 짜여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가 구성의 한 요소로 충실하게 일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대화란 결국 캐릭터와 캐릭터의 담화다. 캐릭터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장치다. 대화에서 캐릭터성이 보여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기초적인 일이다(대화로 캐릭터성을 잘 살리는 작가로는 백덕수 작가가 있겠지). 하지만 과잉 무지개에서 대화는 캐릭터가 아닌 작가의 말로 보였다. 캐릭터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입을 빌려 작가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소설이라는 건 결국 캐릭터를 빌려 작가가 주제를 전달하는 매체니까. 그러나 대화는 캐릭터의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견을 담은 캐릭터를 조성하고, 그 캐릭터가 글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과잉 무지개는 아쉽다. 캐릭터가 자신의 의견을 대화로써 표출하는 것이 아닌,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작가가 대뜸 전면으로 나서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둘째, 인위적인 사건.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잘 알겠다. 이 글은 정말로 치밀하게 짜인 글이다. 구상에 많은 힘을 썼으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주제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일련의 흐름이 지나치게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A라는 캐릭터는 초콜릿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모종의 사유로 초콜릿을 먹어야 한다는 목표가 있다. 이때 작가는 A가 초콜릿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을 묘사하고, 그 거부감을 차차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초콜릿 향을 입힌 음식을 먹기, 초콜릿이 소량 함유된 음식을 먹기, 초콜릿 함유량을 천천히 늘리기 순으로 사건을 진행할 수 있겠다. 그러다가 마지막 결말에서, A는 초콜릿 하나를 완전히 먹음으로써 자신을 가로막았던 고난인 초콜릿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지만 과잉 무지개에서 조성된 사건들은 그러지 않는다. 과잉 무지개를 구성하는 사건들은 지나치게 굵직하다. 물론 주인공에게는 도전과 좌절이 필수적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가로막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며 점진적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형태를 그린다. 과잉 무지개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인위적으로 느꼈던 것은 바로 이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거듭되는 고난"이다.


    할머니가 왜 죽어야 했나? 유기견 보호소는 왜 불타야 했고? 터진 사건은 크지만 그 사건을 십분 활용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단순히 삶의 소중함뿐 아니라 죽음에 관한 고찰이 함께 나왔다면 어땠을까. 유기견 보호소가 불탄 사건이 주인공에게 무엇을 주었나. 푸름이를 바라보며 삶에의 미련을 가지게 된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그것과 보호소가 불탄 사건은 별개의 것이다. 푸름이가 좋은 주인을 찾아가게 된 사건으로의 활용? 고작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유기견 보호소를 통째로 불태우는 건 수지타산에 안 맞지 않은가?


    사건은 그 크기가 커질수록 응당 그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사건을 낭비하는 일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잉 무지개는 많이 아쉽다. 지나치게 큰 사건을 부여하지만 그것을 골수까지 활용했다는 인식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사건은 이질적이고 인위적으로 다가온다. 온전히 활용하지 못했기에 유난히 툭 불거져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결말. 이것은 두 번째와 결을 같이 한다. 일종의 반전을 노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야 한다. 하지만 반전이라는 건 결국 떡밥이 있어야 성립한다. 과잉 무지개는 결말(이 모든 건 죽고자 하는 사람들을 회생시키기 위한 절차였으며, 대부호가 뒷돈을 대어주고 있다)을 위해서 무슨 떡밥을 뿌렸나? 단 한 번이라도 이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수면 위로 공고히 한 적 있던가? 내가 기억하는 한은 없다.


    게다가 대부호가 대어주는 뒷돈으로 빚을 갚아주고, 백 일 동안 일정한 금액을 부여하며 삶의 의지를 되찾을 수 있게 돕는 단체라는 발상은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만약 그 단체에 연락했는데, 빚이 수백 억이라서 갚아주지 못할 지경이라면? 그럼 그냥 죽게 둘 건가? 뒷돈을 대어주는 대부호에게 온전히 의지한다면, 그 대부호들이 손을 끊는 순간엔 어떻게 되는가? 우리나라 연금처럼 주식 투자로 돈을 마련하나? 판타지로 갈 거라면 완전한 판타지로, 현실적으로 갈 거라면 완전한 리얼리즘으로 가야 하는데, 어중간하다. 그리고 그 어중간함이 몰입도를 깨트린다.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데도 전형적이다. 게다가 갑.튀.조(갑자기 튀어나온 조직)라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다. 소설을 진행하며 중간중간 관련된 말을 떡밥처럼 뿌려놔 윤곽을 잡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반전이야 좋지만 예고 없는 반전은 땅에서 갑자기 물고기가 튀어나오는 격이다. 연못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 물고기가 튀어나와야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땅에서 물고기가 튀어나오면 당혹스럽기만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과잉 무지개는 '뭘 말하려는지는 알겠지만 방식과 결말이 아쉬운' 글이 되겠다. 뜯어볼수록 아쉬운 구색이 드러난다고 느낀다. 하지만 킬링 타임용으로는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추천/비추천을 나눈다면 우선은 추천한다. 시간이 빌 때 붙잡고 가볍게 읽기 괜찮은 책이었다.

  • 의심과 불신이라는 것

    젊은 작가에 관하여

    리뷰

    미리 말하고 가겠다. 나는 젊은 작가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저명한 비평가도 아니고, 문학적 소양이 천장을 뚫을 듯이 높은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일개 독자로서 호불호 정도는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미친 듯이 읽지는 않지만 꾸준히 읽는 사람으로서, 내가 젊은 작가들을 향해 가지는 호감도는 마이너스에 가깝다. 그들의 책을 읽을 때는 거의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책을 사서 읽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악평을 뚱뚱하게 남기는 내 미래가 보이니까. 책이라도 사서 드는 미안한 마음을 조금 내려보려고. 그런데 뭐… 어떡해? 내 취향이 아닌데?

    젊은 작가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대개 이렇다. 일단 첫째, 불친절하다. 문학이라는 건 결국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독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는 조금도 이해도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명해야 한다. 이 세계는 어떤 세계고, 이 장소는 어느 장소고, 이 캐릭터들은 어떤 캐릭터인지. 엽편이라면 첫 문단 안에, 단편이라면 첫 장 안에, 장편이라면 그보다는 널널하지만 적어도 기-승-전-결 중 기의 극초반에는 서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은 그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보였다. 초반부 후킹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나도 글 쓰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문의 기초적인 요소를 배제해도 되는가?

    둘째, 문장 겉멋이 심하다. 그냥… 내 호불호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 나는 화려한 문체를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데 내가 읽은 젊은 작가들은 그게 좀 심했다. 의미도 없이 문장은 왜 단락을 띄우나? 강조하려는 건가? 그런데 나는 밥을 먹었다. /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으로 보인다. 한 문장 띄우기가 강조로써 활용되는 이유는 그게 두꺼운 단락 속에서 눈에 띄기 때문이다. 잦은 문단 띄우기는 읽는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게다가 문장들이 무슨… 사진 찍혀서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올라가 <느좋 문장>이라는 태그를 달고서 떠돌아다닐 것 같은 수준으로 겉멋이 들었다. 문단과 스토리를 따른 깊은 의미가 느껴질 때가 드물었다. 간단히 말해서, 겉멋 든 문장을 빼도 그 문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문장의 의의가 무엇인가? 빼도 상관없는 문장은 될 수 있다면 빼는 것이 퇴고의 기본 아닌가?

    셋째, 작가의 주관이 지나치게 뚜렷하다. 이것 또한 내 호불호의 영역일 수 있다(하지만 이렇게 따지면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불호의 영역이므로 앞으로는 생략하겠다). 나는 작가의 신념이 엿보이는 창작물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엿보일 때>에 한정된다. 작가가 수면 위에 또렷하게 드러나는 건 흡사 식탁에 앉은 손님의 입에 제 음식을 쑤셔 넣는 행위와 진배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해석을 세련되게, 그리고 은은하게 드러내어 독자로 하여금 추론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잘 쓴 글이라고 정의하는 글들의 특징점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는 글들은 대개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확고했다. 주제부가 확실한 건 물론 칭찬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 주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의식이 지나치게 뚜렷해 보였다. 모 아니면 도 같다. 너는 이 주제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아야 해. 내 책을 읽는 이상 그래야 해. 내 책에서는 오로지 이 이야기만 전할 거야. 감상의 주체는 독자다. 그 당연한 사실조차 통제하려고 하는 우악스러움이 엿보이는 것만 같다.

    본인들 세계관에 심취해 있는, SNS에서 바이럴될 만한 힘 있는 문장을 남발하는, 독자에게 자신의 신념을 떠먹이는, 그러느라 때때로 기본기를 잊는 것 같은 작가들. 그게 지금까지 내가 젊은 작가들을 향해 가진 인상이다. 그냥… 오너 못 숨긴 남의 자작 캐릭터 로그 보는 기분이다. 미칠 것 같다. 내 눈에 그들의 눈은 지나치게 화려한 빈 깡통 같다. 장르 문학과 소위 순문학이라고 불리는 계열이 조금씩 맞물리고 있는 현상 또한 나의 분노에 조금쯤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모든 젊은 작가가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안다. 그런데 어떡해?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젊은 작가가 이랬는데? 확증 편향이라고 부를 거라면 안 그런 젊은 작가 책을 내게 많이 소개해달라(제발)… 모르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장르 문학이나 웹소설을 얕잡아 보는 건 결코 아니다. 나도 장르 문학 좋아하고 웹소설 좋아한다. 뭐가 더 고귀하고 잘났고의 문제보다는 기본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매함의 봉우리에 빠진 오타쿠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지나가라(볼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젊은 작가 책들을 상당히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고, 거의 모든 젊은 작가가 상기한 특징들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얼마 전에 기대하며 읽었던 젊은 작가 시리즈 책이 어떻게 출판된 거지 싶을 정도로 최악이라서 더 화가 난 건 맞다. 선생님, 선생님은 출판하시기 전에 필사를 조금 더 하고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었지… 좋은 젊은 작가 책을 찾고 싶다. 진심으로 그렇다. 부탁이니 누구라도… 누구라도 추천해줘라. 그럼 언젠가 내 생각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니까.
  • 뿌리 없는 천성에 따라 새들이 골공한다

    무풍지대
    5
    관람일 2025-09-02
    국가 한국
    장르 시집
    감독 윤희준
    출연 -

    리뷰

    까놓고 말하자면 시집은 별로 취향이 아니다. 문장력 기르기 위한 훈련의 일환으로 종종 읽고 필사하기는 했는데, 사실 내게 시는 소설보다 난해하고 어려운 분야다.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하는지 모르는… 게다가 소위 말하는 요즘 시, 그러니까 <그놈의 토마토 윤슬 라벤더 비눗방울…> 같은 내용이 들어가는 친구들은… 싫어한다기보다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감을 못 잡는 편이다. 이러한 까닭 때문에 시는 항상 조금 먼 존재였다. 무풍지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무풍지대, 윤희준 시인. 처음 접한 건 좋아하는 장르의 좋아하는 연성러 분이 추천해주시는 트윗이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좋았던고로 알티 추첨해서 한 분께 선물을 드리겠다는 요지였다는 건 확실하다. 나는 그분의 글을 아주,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궁금해졌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까지 추천하시는 걸까? 궁금한 건 못 참는 사람이라서 바로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시켰고, 이틀 뒤에 왔다. 첫 인상은 일단 표지가 취향인데? 였다. 나는 모두가 알아주는 자타공인 겨울 아포칼립스 외로움 쓸쓸함 미친놈이었으므로… 표지부터 느껴지는 어떤 짙은 고독의 삘(feel)이 나를 사로잡았다. 게다가 내 눈을 확 끈 건 뒷면에 있던 작가의 말(본 글의 제목이 그 일부다), 그리고 책 날개에 있던 작가 소개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리라고 확신한 적 있었다. 지금도 기적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하다. 이 시집은 사멸과 불안의 도로에서 기어이 엮어내고야 만 생존의 흔적이다.> 이 문장이 왜 그렇게 사무쳤는지. 같은 생각을 해본 사람이기에 문장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불완전한 내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한에서는 항상 우울했다. 나의 우울은 좌절이나 절망보다는 은은한 무료감, 무기력감에 가까웠다. 긴 세월 동안 삶에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못했고, 그렇기에 미련도 없었으며, 잠들기 전 눈을 감았을 때 다양한 방법으로 내가 죽는 상상을 했다. 지금에야 많이 나아졌지만, 우울과 위축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고 나와 함께한다. 이러한 상황이 있었기에 나는 작가를 처음 만나는 책 날개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책에 매료되었고, 이후 이 흥분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애당초 나는 문장에 기교를 많이 넣는 편이 아니다. 화려한 문체는 읽기에 번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최대한 정적이고 덤덤한 문장을 추구한다. 윤희준 작가의 문장은 말하자면 나의 이데아 같았다. 높낮이가 크게 없고 평이한데 담담함이 주는 울림은 한도 끝도 없이 크다. 상황과 묘사에 따라 적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을 쌓아가는 방식이 굉장히, 정말 굉장히, 말로 이르기 어려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글을 쓴다면 이렇게 쓰고 싶었다. 글을 잘 쓰게 된다면 이런 글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시,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내용 안에 주제부를 축약하여 전달해야 하는 매체 특성에도 불구하고, 윤희준 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는 굉장히 또렷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매 시, 매 글, 매 단어가 그랬다. 심혈을 기울여서 쓴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작가는 살라고 말한다. 기적 같은 건 믿지 않고, 앞으로는 더 나아지리라고 확신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래도 살라고 전하는 목소리에는 채 떨치지 못한 고독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게 인상 깊었다. 글 곳곳에서 나는 어쩌면 기질적일 시인의 외로움을 느꼈고, 그 고독은 매 순간 시를 한층 풍부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장을 거듭하여 넘기면서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건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이토록 명징하게, 그리고 이토록 확고하게 주제가 전달된 시는 처음이었다.

    살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좋다. 어떻게든 생존한다면, 부득불 살아남는다면, 마지막엔 결국 살아남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창작물들을 좋아한다. 내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약 없더라도 비관보다는 기대가 좋다. 허무주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개인주의는 혐오하다시피 한다. 이 세계에서 가장 불필요한 태도는 냉소일 것이라는 신념에 가까운 생각은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있다. 타인에게 다정하고, 베풀 수 있는 것을 베풀고, 누군가를 섣불리 혐오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이상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느낀다. 나의 생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 또한 상당하다. 내가 잘못된 것 같다는, 이 세상에 잘못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자라는 내내 끝없이 받았다. 차라리 해파리로 태어나야 했다고, 나는 생각보다 자주 생각하고는 했다.

    정말 개인적인 시각일지 모르지만, 시집을 읽는 내내 나는 내가 느꼈던 고독과 적요를 잘 다듬은 문장으로 읽는 듯한 감상을 받았다. 시인은 시를 이용해 끝없이 자신이 겪었던 외로움을 나에게 표출하는 것 같았다. 그게 싫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동질감에 가까운 감정들이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매 순간 진하게 남았다. 단순히 문장이 아름답다거나 시의 주제부가 화려하다거나 하지 않다. 그런 부류를 바란다면 이 시집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무풍지대>는 우직하고 고요하게, 드넓은 바다를 낮게 활공하는 바닷새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기묘한 아득함과 고독을 이야기한다. 외로웠다는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앞으로, 한 걸음씩 느리게 걸어나가며 속삭인다. 버티고 보니 괜찮았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한번 버텨보지 않겠냐고. 다정한 시집이다. 삶에 피로감을 느낀다거나 지쳤을 때, 누군가에게 토로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 읽는다면 큰 위로를 받을 거라고 감히 말한다. 글을 끝맺기 전 좋아하는 구절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만 팔 벌려 맞이할 수 있는 진정한 소멸이 있다. 태초의 등대에서 우주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마주하면, 나는 수천 계단 끝의 머나먼 응시처럼 진실한 눈을 갖게 된다. 온기 없는 진실한 눈, 내가 감히 사랑보다 바라 왔던, 진실한 눈을. / 무풍지대 중, 무풍지대, 윤희준